제 746 호 [책으로 세상보기] 우울하고 불안해서 어쩌라고-<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 허지원 | 김영사 | 2020 | 264면 스스로가 낯설 때가 있다. 이유 없이 우울하거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그렇다. 원인 모를 감정은 생각의 늪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박식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란 제목은 묘한 흡입력을 갖고 있다. 책의 저자는 뇌과학자이자 임상심리학자다. 근거 없는 ‘가짜 심리학’과 뻔한 자기계발서가 판치는 현실에서 저자는 임상심리학과 뇌과학에 관한 검증된 지식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자 이 책을 썼다. 말뿐인 위로는 일시적이다. 과부하 걸린 마음을 치유할 순 없다. 보다 직설적이고 과학적인 해답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이래저래 범상치 않은 책이다. 듣기 좋은 말을 포장해 놓은 여타 에세이 책과는 확연히 다르다. 뇌의 기능을 직접적으로 소개하며,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위로를 건넨다. 낮은 자존감, 애정 결핍, 완벽주의, 불안과 우울 등 우리를 시험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수도 없이 많다. 이 책의 차이점은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나오는 ‘오늘의 숙제’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당신의 자존감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당신과 똑같은 사람과 평생 함께 지낼 수 있습니까?”과 같은 질문으로 내면을 검토한다.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자신을 이해하는 시간이 된다. 늘어난 자기 이해는 ‘자아’를 형성하고 자신의 감정에 유연하게 대처할 여유를 준다. 저자는 높은 자존감이란 ‘착한 지도교수’나 ‘부모의 손이 필요 없는 아이’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 같은 허상이라 말한다. 굳이 허상을 좇으며 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어쩌면 세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단순할지도 모른다. ‘나는 왜 살지?’란 물음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왜’보다 ‘어떻게’다. 삶의 흔적을 의식하면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자. 행동이나 일, 또는 어떤 대상이 삶의 의미여선 안 된다. ‘어떻게’에만 집중하자. 어떻게 일할지, 어떻게 놀지, 어떻게 사랑할지. 우리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아도 괜찮다. 저자는 ‘어쩌라고’ 마음가짐을 강조한다. 우울하고 불안해서 어쩌라고. 삶이 무의미한 것 같아서 어쩌라고. 뭐 어떤가? 하루가 즐거우면 좋고, 아니면 또 마는 것이다. 우리는 불완전해도 충분하니까. 자신을 좀 더 편하게 두자. 신범상 기자
제 746 호 [교수칼럼]서른 즈음에
“무분별한 시절의 불 꺼진 유쾌함이 / 어렴풋한 숙취처럼 나는 힘겹네. / 하지만 포도주처럼 지난날의 슬픔은 / 내 영혼 속에서 오래될수록 더 강하네. / 나의 길은 우울하네. 미래의 요동치는 바다는 / 노동과 비애를 내게 명하네. // 하지만, 오, 벗들이여, 나는 죽고 싶지 않아. / 사색하고 고통받기 위해 나는 살고 싶다. / 슬픔과 근심과 동요 가운데 / 향락이 내게 있을 것임을 나는 아네. / 때로는 다시 조화에 흠뻑 취하리라. / 창조물 위에 눈물을 쏟으리라. / 그리고 아마 내 슬픈 석양에 / 사랑이 작별의 미소로 빛나리라.”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쓴 「비가(悲歌)」라는 시다. 서른 무렵, 20대의 삶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선 인간의 착종된 내면 풍경이 펼쳐진다. 속절없이 흘러간 날들에 대한 아쉬움으로 인한 애수가 영혼에 넘쳐난다. 허무에 신음하는 시인은 마땅한 만족을 주지 않는 노동으로 가득 찰 불분명한 삶의 앞길을 불안에 차서 바라본다. 과거도 현재도 끔찍하고 미래는 너무도 불분명해서 삶의 소망 자체가 사라질 지경이다. 하지만 시인은 내면의 한 축에 자리한 염세적 절망에 맞서며 삶에 대한 여전한 희망을 품는다. “노동과 비애”의 우울한 미래를 예견하면서도 동시에 장중한 음조로 “미래의 요동치는 바다”에 뛰어들리라 말한다. “슬픔과 근심과 동요”의 연속인 삶에 대한 믿음과 열망을 외친다. “하지만 오, 벗들이여,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사색하고 고통받기 위해 나는 살고 싶다.” 비극적 허무를 딛고 삶을 예찬한 시인 푸시킨의 면모를 대변하며 그의 삶의 신조를 표현하는 시구가 그렇게 태어난다. “사색하고 고통받기 위해”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왜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푸시킨이 “벗들”에게 고백한 성년의 삶을 대하는 자세는 그의 동시대인을 향한 말을 넘어 ‘인간다운 삶’에 대한 보편적 호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바로 “사색”과 “고통”이 지닌 인문적 의미 때문이다. 인문, 곧 ‘인간다움’의 기초는 자유다. 인문학의 어원인 라틴어 ‘artes liberales’가 인간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기술’을 뜻하듯, 인간은 자유로울 때 인간다울 수 있다. 사색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인간은 자신과 삶, 그리고 세계를 부단히 성찰하며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존재이기를 그치고 자유로운 ‘단독자’의 삶을 정립해 나간다. 사유함은 곧 자유롭게 됨,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을 의미한다. 고통은 창조적 의지로 삶과 대결하는 자유로운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몫이다. 혼돈과의 고통스러운 대결의 과정을 거쳐 “향락”과 “조화”와 창조의 기쁨의 순간이 삶에 찾아온다. 인간은 자유롭기에 혼란스러운 삶의 흐름 속에서 실수와 죄악을 저지르고 그 책임을 감당한다. 사색하는 인간에게 실수와 죄악이 남긴 정신적 상흔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의 동기가 된다. 이렇게 고통은 또한 삶에서 빚어진 실수와 죄에 대한 기억과 책임감의 소산이다. 묵을수록 더 향기를 발하는 포도주와 같은 정신적 상흔을 안고 기로에 선 「비가」의 인간처럼, 고통받는 인간은 망각하지 않는 인간이다. 과거의 어두운 면모는 소중히 안고 살아가야 할 삶의 자산이다. 양심의 고통이 촉발하는 실수와 죄악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간은 도덕적 성숙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설익은 젊음을 뒤로 하고 두려움에 맞서 싸우며 담대히 혼돈의 삶을 헤쳐 나가는 인간, 그 과정에서 실수와 죄악으로 얼룩진 삶을 부단히 성찰하며 도덕적 성숙을 향해 나아가고 창조적 정신으로 실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인간, 그것이 「비가」를 통해 대두되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다. 격정의 20대를 보내다 어쩌면 삶의 허망함에 절망하고 희뿌연 눈보라에 가려진 길 앞에서 주저앉을지 모를 청춘에 이 ‘슬픈 노래’를 바친다. 글로벌지역학부 최종술 교수
제 746 호 [교수사설]견제와 균형, 정책거버넌스의 필요성
행정과 정치는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갖는다. 동전의 양면처럼 영역과 역할은 다르지만 늘 함께 하면서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정운영을 수행한다. 새 정권이 시작할 때마다 정부혁신을 통해 행정의 변화를 유도하고, 정권이 추구하고자 하는 국정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방향성의 제시와 진척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공직에 입직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행정관료 다수는 대체로 일정한 경쟁적 채용방식을 거쳐 임용이 된다. 흔히 공직을 2개 부류로 표현할 때 늘공( ‘늘 공무원’-공무원 시험을 거친 직업 공무원)과 어공(‘어쩌다 공무원’-주로 공무원 시험을 거치지 않은 전문 임기제 공무원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늘공과 어공은 각각의 주어진 임무가 다르지만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늘공 집단의 힘이 너무 강해지거나 어공 집단이 조직화되어 과도한 힘을 발휘하게 되면 상호 균형을 잃게 되어 국정운영에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된다. 과거 경제개발이 절실하던 시기에는 엘리트 관료의 역할과 비중이 매우 높았다.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공직에 대한 기대감과 그 역할도 변화하고 있다. 한국 행정의 역량은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고. 특히 해외 체류 경험자들은 이에 대한 공감을 적극적으로 언급한다. 대한민국 입국의 관문인 공항의 출입국 시스템과 해외 출국시 스마트폰에 뜨는 영사서비스 문구는 잠시 울컥한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한다. 정부 행정의 영역은 시스템으로 작동이 되고 있다 보니, 더 이상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문제해결의 영웅 ‘수퍼맨’이나 ‘스파이더 맨’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 시스템이 작동되기까지 관료와 정치인의 역할도 컸지만 시민의식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반쪽짜리 시스템이 되었을 것이다. 사회자본의 중요성을 주장한 퍼트남(Robert D. Putnam)교수는 협력행위의 유발이 사회적 효율성을 높여 줄 수 있고, 동시에 협력을 촉진시키는 능력임을 강조하였다. 고도의 사회자본은 정부 제도의 효과적 작동을 촉진시키고, 부패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과 무엇보다 정치안정과 사회적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어 이에 대한 기대가 크다. 코비드19 펜데믹 과정에서 경험한 비대면 관계는 SNS 등 네트워크를 통한 집단지성의 활성화로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주요 요소가 신뢰이다. 신뢰는 사회의 다양한 세력들을 응집하는 매우 강한 통합능력을 갖고 있다. 신뢰는 선행을 베풀자마자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보상될 것이라는 맞교환 성격의 치밀한 계산 보다는, 지금의 선행이 미래의 언젠가는 보상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치밀하게 계산된 관계가 아닌 보편적 신뢰와 호혜적인 행동이 일부 사람들에게 국한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로 확산될 때 신뢰의 밑거름은 더 견고해진다. 재난 발생시 생면부지의 누군가를 위해 묵묵히 선행을 하는 시민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행동에 감사함을 표하는 마음을 SNS에서 읽게 된다. 우리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신뢰의 원동력이다. 반면 일부 정치인의 보여주기식 현장 사진찍기는 식상함을 넘어 정치불신으로 이어진다. 신뢰와 호혜주의의 확산은 협력을 촉진하며, 사회 전체의 협동 능력을 향상시킨다. 그러나 사회자본은 생성되기는 어려워도 파괴되기는 쉽다. 열 번을 잘해도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이치와 동일하다. 사회신뢰를 회복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매우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다.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관료는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수요자 중심,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진정 고객은 누구이고 어떻게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는 정책을 상품으로 최적화할 것인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말처럼 정책의 디테일이 중요해지고 있다. 그동안 쌓아온 행정역량이 정책실패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정책거버넌스의 작동이 중요한 시점이다. 대학 캠퍼스에서 우리 학생들은 신뢰를 만들어 가기 위한 균형적 시각을 갖춰야 할 것이다.
제 745 호 [책으로 세상 보기]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사진: https://images.app.goo.gl/oDmkR4Exy7k4RZ156) 오늘날 혐오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이러한 혐오가 어떻게 형성되고 확산되는지를 탐구하며, 이를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이 책의 저자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 문학과 철학에서 중요한 인물인 윌리엄 헤즐릿(William Hazlitt)이다. 그는 인간 본성과 감정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경험을 사회적·정치적 문제와 연결하는 에세이로 명성을 얻었다. 헤즐릿은 감성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시각에서 심리를 탐구하며, 이 책에서도 혐오라는 복잡한 감정이 개인과 사회에서 어떻게 즐거움과 결합하여 확산되는지를 분석한다. 책은 혐오가 단순한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때때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우리는 타인을 비난하고 배제할 때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고 말하며, 혐오가 공동체적 결속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혐오의 감정이 정당화될 때, 사람들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당연시하게 되며, 이는 더욱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특히 이 책은 혐오가 사회적 갈등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정치적 이념, 인종, 젠더, 계급 등 다양한 영역에서 혐오는 갈등을 부추기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집단을 적대시하는 경향을 강화한다. 저자는 “혐오는 단순한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이용된다”고 말하며, 혐오가 권력 관계와 맞물릴 때 더욱 깊은 문제를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혐오를 조장하거나 이용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혐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저자는 혐오를 단순히 억제하거나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혐오의 기저에 깔린 심리적·사회적 요인을 분석하고 해결해야 하며, 혐오의 즐거움을 넘어 더 나은 사회적 유대와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혐오를 없애기 위해서는 혐오를 즐거움으로 여기는 심리 자체를 이해하고, 그보다 더 강한 결속과 연대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혐오를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조적·심리적·문화적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혐오의 작동 방식과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은민 기자
제 745 호 [교수사설]상명인을 위한 조언
대학 캠퍼스의 3월은 싱그럽다. 교내 이곳저곳에 생기가 돌고 여기저기서 맑은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새로운 인생의 챕터를 힘차게 열어젖힌 신입생들이 들어왔기 때문에도 그럴 것이고, 대학 생활의 마지막을 보내야 될 ‘관록’의 4학년에게서 다부진 결기가 느껴져 더욱 그렇다. 대학을 졸업한 많은 사람들은 '그 좋던' 대학시절의 기억이 가물가물하겠지만, '그 좋은' 시절을 보낼 대학생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전한다. 첫째 학교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이 되기를 바란다. 수업은 대학생에게 매우 중요한 과정이고 훌륭한 기회이다. 과거에는 교수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지식이 교수자의 입을 통해 전해졌고, 손에 의해 작성된 판서를 통해 전달됐다. 지금은 인공지능 시대다. 과거와 비교해 매우 짧은 시간에,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지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자판기를 두드려 확보한 정보는 지식이라 부르기 힘들다. 읽고, 듣고, 생각한 정보들이 지식으로 축적된다.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고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또 대학에서는 지식습득만이 전부는 아니다. 리더십도 기르고 협동하는 법도 배워야 하고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별 과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수업 시간에는 필사적으로 발언할 기회를 잡고, 매주 20시간 이상 지식을 쌓기 바란다. 둘째 교제의 폭을 최대한 넓혀라. 교내에서 다양한 전공과 배경을 가진 동료를 적극적으로 찾아라. 단 세명의 사람이 모여도 그중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 하물며 상명대의 수많은 전공과 입학생들의 다양한 출신 지역을 생각하면 ‘도처에 사부가 널려있다’ 할 수 있다. 아직은 미숙하더라도 전공이 다르면 관점이 다르고 생각의 방향이 다르다. 그 속에서 몰랐던 사실과 진실을 배우고 깨닫게 된다. 가급적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라. 그리고 주위에 있는 동료와 선배와 후배를 만나라. 때로는 술 한잔도 하시라. 한주에 보낸 가장 풍요로운 시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운동을 시작하라. 지금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본인이 잘하는 운동과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으면 된다. 운동은 만국의 공통어다. 특히 외국에서 친구를 사귀든, 비즈니스를 하든, 아니면 그저 여행을 하든, 서먹함을 없애는 데는 운동이라는 소재가 최고다. 원래 처음 보는 사람과는 ‘정치와 종교’ 얘기는 금물이다. 만일 좋아하는 팀이 같다면 밤새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함께 땀 흘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목적을 달성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을 위해서는 운동이 최고 아닌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라는데,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법이다. 넷째 패기와 배짱을 가져라. 달리 말하면 실패할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라. 경험이 없기 때문에 늘 새롭게 도전하기 마련이고 실패는 불가피하다. 처음에는 누구나 서툴고, 실패를 해야 배우는 것이 많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경험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패해야 한다. 실패 의 역설이라고 할까. 뻔뻔할 만큼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마라. 대학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다. ‘다들 아름답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현실은 옹색할지 모르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불투명해 보이고 빈곤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도 불안 속에 희망을 꿈꾸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라. 그러다 보면 저절로 문이 열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문은 꼭 두드려야 열리는 것만은 아니다. 꿈을 꿔도 열린다.
제 745 호 [교수칼럼]사라져가는 단어들, 머릿속 사전에 등재하자
방송에서 고등학생들의 문해력을 테스트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한 학생이 제시된 단어를 설명하고 다른 학생이 맞히는 게임이었다. ‘존함’이 나오자, 난감한 표정의 학생이 머뭇거리더니 이내 ‘아주 큰 함성’이라고 설명했다. 비속어인 ‘존’과 ‘함성’의 첫 글자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영상을 지켜보던 출연자들의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낯선 단어를 접했을 때의 해석 방식과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어휘력 수준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휘력 부족으로 인한 문해력 저하는 뉴스에서도 심각하게 다뤄지고 있는 문제이다.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착각하여 과제를 제출하지 못했다거나, ‘중식(中食)’을 ‘중국 음식’으로 오해하여 한식으로 제공해 달라고 항의했다는 사례, ‘심심한 사과’에 대한 논란 등은 문해력 저하의 대표적인 예시로 자주 언급된다. ‘고지식(하다)’를 ‘높은 지식’으로, ‘선무당’을 ‘서 있는 무당’으로, ‘사흘’을 4일로 오해하는 등 청소년들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 발생한 이야기들은 지금도 꾸준히 추가되고 있다. 그러나 언론이 매우 ‘충격적’이라고 다루고 있는 청소년들의 어휘력 문제는 현재의 청소년들에게만 해당될까? 과거의 청소년이었던 기성세대는 언제쯤 저런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익혔을까?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심심하다(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난감하고 이상한 말이었다. 옆집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던 날, 어머니를 여읜 아저씨에게 아버지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느릿느릿하고 낮은,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르신께서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심심한 위로를 전하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나도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라니! 위로는 왜 또 ‘심심하게’ 하신단 말인가?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시면서 왜 위로는 심심하게 하실까? ‘심심하다’를 ‘싱겁다’로만 알고 있던 내게 ‘심심한 위로’는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난해한 표현이었다. 어휘력이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뜻을 익히게 되었지만,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거의 청소년이었던 나도 현재의 청소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무지함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요즘 청소년들의 어휘력 저하를 우려하는 시각은 유효하지만, 이 문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접근도 가능하다.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사례 중 상당수는 사용 빈도가 낮은 한자어들이다. ‘심심한 사과 또는 위로’와 같은 표현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고, ‘중식’, ‘금일’ 같은 단어들도 일상에서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이를 모르는 것이 반드시 문제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오히려 현대의 언어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현상일 수도 있다. 실제로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는 수십만 개에 이르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쓰였으나 현재는 쓰이지 않는 죽은 말, 즉, ‘사어(死語)’, ‘폐어(廢語)’, ‘유령어(ghost words)’가 된 표제어도 많다. ‘기적(汽笛) 소리’를 ‘기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소리’라고 설명한 학생처럼, 일부 단어들이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은 시대적 변화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단어를 익히고 유지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세상에 몰라도 되는 단어는 없다. 하나의 단어를 아는 것은 그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와 가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휘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독서와 경험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단어를 접했을 때, 단순히 뜻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맥락까지 파악해야 한다. 단어를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말하고 쓰는 연습도 해 보자. 어렵고 어색했던 단어가 머릿속 사전에 자리 잡으며 생명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사라져 가는 단어라 할지라도 머릿속 사전에 등재해 두면 언젠가 적절한 순간에 빛나게 사용할 수 있다. 어휘를 확장하는 노력은 우리의 사고력을 깊게 하고 세계를 넓히는 과정이며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계당교양교육원 방영심 교수
제 744 호 [교수칼럼]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서
올해 겨울은 날씨의 변동성이 유난히도 큰 것 같습니다. 이 원고를 작성하는 2월 7일 현재, 서울 종로구의 기온은 –9도입니다. 그리고 체감온도는 더욱 낮습니다. 어젯밤에는 소복이 큰 눈이 내려서, 인왕산 주변과 캠퍼스 곳곳이 눈꽃으로 가득합니다. 지난해 말 확인한 기상 예보에서는 올겨울이 평년보다 따뜻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예보와는 달리, 2월 들어 날씨의 변동이 평소보다 훨씬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명의 교정에서 이 글을 읽게 될 3월에는 새싹이 막 돋아날 것입니다. 조만간 알록달록한 꽃들도 교정을 가득 채우겠지요. 저는 상명인 여러분 개개인에게도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과거에 예상한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변화는 일기 예보와 마찬가지로, 현재 예측한 것이 실제는 다를 가능성이 큽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상명의 학생들이 인생에서 2월을 지나 이제 막 3월에 접어들었다는 점입니다. 곧 사회에서도 알록달록한 여러분만의 예쁜 꽃망울을 터뜨릴 것입니다. 물론 개개인이 앞으로 어떤 꽃으로, 어디에서 활짝 필지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생활의 변동성이 커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움츠러들기 쉽습니다. 올겨울, 급격한 날씨 변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변화도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현재의 불확실성 속에서 움츠러든다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재가 아무리 춥고 향후 며칠 동안 맹추위가 지속될지라도, 변덕스러운 겨울이 지나면 결국 봄이 오고 꽃망울이 피어납니다. 특히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에서 충분한 햇빛을 받고, 적절한 습도와 영양을 흡수하며, 해충과 질병의 위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친 꽃망울은 결국 풍성한 결실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 상명인 여러분 중 일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매우 추운 시기이며, 앞으로 그 추위가 더욱 심해지고 주변 환경의 변화가 많아 불안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상명이라는 양질의 토양에서 충분한 햇빛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본연의 역할을 깨닫고 자신의 역량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쌓고, 앞으로 마주할 어려움과 난관을 꿋꿋이 극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향후 사회에서 값진 성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상명인 여러분의 앞날에 따뜻한 봄날과 아름다운 꽃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유승동 교수(경제금융학부)
제 744 호 [교수사설]과거와 역사에서 배우는 지혜
지난해를 돌아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사스러운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노벨상이 발표되는 10월만 되면 “과연 우리도 수상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아쉬움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은 그러한 갈증을 단번에 해소해 주었다. 이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한 나라가 된 우리는 영화·음악·드라마 등으로 대표되는 K컬처가 그저 서구문화의 모방이나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적 역량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다시금 확인시키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한국은 대륙과 섬의 중간에 자리한 반도 국가이자,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천 년의 역사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이 땅의 ‘서사’에 담긴 사람들의 삶과 정신력이다. 한강 작가가 빚어낸 ‘문학’은 이러한 역사의 상흔과 극복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우리가 언어와 인종이 다른 세계 여러 민족과 깊이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밑바탕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서사’, 즉 문학·드라마·영화가 전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만들어진 서사는 그 어느 한 장면도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과거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날의 고난과 아픔을 마주함으로써 현재를 견디고 미래를 그려내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을 들어 보면, 작가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단지 문학에만 국한되는 물음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나의 과거는 나의 현재를 돕고 있는가. 혹은 우리 대학의 과거는 현재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 과거와 역사는 화석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디딤돌이자 미래를 위한 도약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과거를 우리가 어떻게 마주하고, 어떻게 재해석하느냐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과 학교 구성원 모두 각자 자신의 ‘과거’를 짊어지고 있다. 그걸 다른 말로 자신의 ‘역사’라고도 부른다. 역사가 현재를 돕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려면 끊임없는 성찰과 탐구, 그에 따른 변화가 뒤따라야만 한다. 대학은 바로 그 탐구의 장이 되어야 하고, 학생들은 대학이 제공하는 지식과 환경 위에서 자신의 과거와 대화하며 미래를 열어 갈 준비를 해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문명 시대에는 인간이 가진 고유한 경험과 서사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바로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과거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학은 학생들이 과거로부터 배운 통찰을 발판 삼아 미래를 창조할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 일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학문을 탐구하고,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며, 이를 토대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봄, 새 학기를 시작하는 모두가 과거를 ‘짐’이 아닌 ‘자산’으로 삼아 한 걸음 더 미래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돕고 있는 과거의 힘이며, 우리가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다.
제 744 호 [영화로 세상보기] 당신은 하나다
▲ <서브스턴스> 포스터 (출처: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61579) 누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이 가장 증오스럽고 혐오스럽다.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겉보기에 알 수 없는 것까지, 알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생생하게 느끼다 보면,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느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이 남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남들만큼 예쁘지 못해서, 남들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남들만큼 잘나지 못해서, 남들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나라서, 그런 나라서 내가 싫다. 그리고 이 세계에 나 혼자 남아 더 이상 비교할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좋아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은 더 나은 모습의 ‘나’, 최선의 ‘나’가 아니기에. 영화 <서브스턴스>는 그렇다면 너 나은 버전의 내가 될 수 있다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유명한 여배우이다. 시간이 지나 50세가 된 엘리자베스는 퇴물 취급을 받으며 오랫동안 진행해 오던 TV 쇼에서 잘리는 동시에 더 이상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배우가 된다. 나이 들어 젊고 아름답지 않은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TV에 나올 수 없다.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더 나은 버전의 나’가 될 수 있는 약물 서브스턴스를 투약하기로 한다. 그리고 더 젊고 아름다운 수의 몸으로 깨어난다. 그렇게 엘리자베스와 수, 한 사람의 영혼으로 이상적인 두 사람의 일상이 시작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수가 명세를 얻기 위해 서브스턴스 사용 규칙을 어기기 시작하면서, 엘리자베스는 급속한 노화를 겪으며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린다. 결국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가 같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싸움을 벌이다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속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하나이다. 더 젊고 아름다운 내가 되는 것. 그러나 영화를 보면 그것이 엘리자베스가 진정으로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느끼는 욕망은 여성을 향한 외모지상주의, 즉 여성을 향해 던져지는 사회의 시선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느끼는 욕망, 그리고 자신을 향한 혐오의 이유가 정말로 엘리자베스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선택한 폭력적이고 파멸적인 결말이 정말로 주체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혐오와 선택의 기저에 사회의 시선이 투영되었고,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더 나은 내가 되길 바라는 욕망, 그런 내가 될 수 없어 나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자기혐오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본다면 그 끝에는 나, 정말로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마음, 진정으로 나를 위한 마음이 아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서브스턴스>는 오히려 그러한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마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김지연 기자
제 741 호 주권의식과 학생회 선거
주권의식과 학생회 선거 대학의 학생회는 학생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대학 구성원의 한 축으로서 학교와 학생들의 사이를 잇는 중요한 기구이다. 총학생회, 단과대학생회 등 학생회의 구성을 위한 선거는 그래서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행사이다. 80년대 총학생회가 출범한 이후 학생회는 사회 민주화 학내민주화의 상징으로 정치적, 사회적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소위 운동권 학생을 중심으로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후 운동권의 분열과 여러 상황으로 학생운동의 힘이 쇠락하면서 거대 담론이 사라진 90년대의 사회 분위기와 IMF 경제위기 이후 정치적 무관심이 가시화되면서 학생회에 대한 기대나 관심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학생회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으로 인한 투표율 저하는 급기야 학생회 구성이 불가능할 상태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코로나로 인한 학생활동의 중단은 학생회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가져왔다. 현재는 온라인 환경의 변화로 학생회라는 대의 민주제 대신 직접 민주제도 가능한 상황이 되어 학생회의 존재의의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희석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학생회의 존재의의에 대한 효용성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2025학년도 우리 대학 학생회를 이끌어 갈 학생회 선거가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서울캠퍼스는 총학생회는 입후보자를 내지 못했으나 다행히 5개의 단과대는 입후보자를 내었고 당선되었다. 천안캠퍼스는 총학생회와 5개의 단과대학 중 두 개의 단과대학에서 입후보자를 내었으나 전체 투표율 30% 미만으로 학생회 결성이 무산되었다. 이번 선거 결과로 내년도 학생 자치활동은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학기에 보궐선거가 실시되어 새로운 집행부가 꾸려진다면 그나마 어려움이 덜하겠지만 온라인 투표로도 철저한 무관심을 표하고 있는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투표를 한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앞날을 전망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동안 많은 대학이 학생회 입후보자의 부재와 학생회 구성의 의결정족수 미달로 기구구성이 무산된 후 학생회 활동을 비대위 체제로 대체해 왔다. 우리 대학 역시 이번 연도 총학생회와 단과대학 학생회 선거의 결과 내년도의 학내에 산적한 다양한 활동은 그간 해온 것처럼 비대위 활동을 통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비대위는 그야말로 비상대책을 위한 임시기구로서 인력이나 영향력 등에서 의결권이 없어 학내외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또한 권한 없는 비대위가 소수의 폐쇄적인 운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학생들은 관례상 학생회가 없어도 축제나 행사는 비대위에서 개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동아리나 단대학생회 학교 측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라 축제의 개최를 단언할 수 없다. 또한 학사 행정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 개진이 어렵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선거의 결과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많은 학생들은 총학생회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정작 투표에는 무관심하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입후보자의 효능감 없는 공약이나 도덕성, 능력에 대한 불만을 투표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대학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철저한 정치적인 무관심과 혐오, 지극히 개인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 정치에 대한 혐오를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표현할 때 우중은 잘못된 정치 지도자를 선택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지는 그동안 세계 각국의 사례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에는 자신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대학 사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학내구성원으로서의 주권 의식을 행사하지 않을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바라기는 어렵다. 학생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비판은 내 권리를 보장하는 방법이고 선거는 그 시작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깨어있는 의식, 감사하는 시각,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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